대부도
대부도에서는 흘곳과 말부흥에서 각각 1군대 등 신석기시대 조개더미 10곳 선석기시대 패총을 발견하여 빗살무늬토기 파편 20점과 타제삭기 1점을 채집하였고 대부중학교에서 흘곳등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마제석부 1점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패총에서 나오는 조가비의90% 이상이 굴 껍데기라고 한다.
다른 서해 도서지방에 비해 사냥이나 농경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타제석기 마제석부 등이 출토된 사실을 가지고 당시주민들이 굴 채취 등의 어로활동 이 외에도 사냥 농업 등에 의한 식량획득도 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고종 13년(1231) 몽고의 제1차 침입으로 부터 고종 46년(1259)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전후 9차례나 침입하였다. 몽고에 대응한 고려정부의 대응을 흔히 “해도임보책”이라 한다. 육지주민을 육지와 가까운 섬으로 옮겨 몽고에 항전을 한다는 전략 이였다. 대부도는 육지에서 가깝고 섬의 면적도 넓어 해도입보를 하기에는 정당한 섬이었다. 최근 대부도 여러 곳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석곽묘는 바로 이 시기 주민들이 남긴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삼남지방에서 수도 한양이 있는 한강 어귀로 들어오는 해상교통로상의 요충지로 군사·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이미 고려시대 몽고침략기에도 대부도에 대부도별초군이 설치되었다. 조선중기에 들어 대부도의 주민 수는 더욱 증가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개편된 지방군제에 따라 남양 화량 본영을 두고 있던 경기도수군전도사가 바람이 잔잔할 때에는 대부도로 옮겨와 주둔하였고 대부도 목장의 목자수가 증가하여 선조 때에는 348명에 달하였으며, 성종 1팔년(1478)부터는 대부도에 둔전이 설치되어 본격적인 개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도에는 한때 사슴이 많아서 사슴을 잡아 진상했다는 사실과 함께 숙종4(1678) 년경에 사슴이 멸종할 정도로 많은 수의 주민이 거주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세기 중엽에 대부도면에는722호,3,002명(이중 남1845, 여1,157)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주요 유인도로는 대부도· 선감도· 풍도· 불도· 탄도· 육도 등이 있다. 행정구역은 대부북동· 대부남동· 대부동동· 선감동· 풍도동의 5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육도, 미육도, 말육도, 변도(꼬깔섬), 잠도(누에섬), 메추리섬, 터미섞,큰터미섬,할미섬, 외지도, 대가리도,소가리도 등 12개 의 무인도를 포함하기도 한다.
대부도의 최고봉은 섬 중앙부의 황금산(黃,金山 167.7m)이다. 이 산을 중심으로100M내외의 소규모 구릉성 산지가 북서~남동방향으로 뻗어 졌으며, 대부도의 산세는 험하지 않고 섬 내에는 방죽천, 분지천, 영전천 등 비교적 큰 네 개의 하천이 있는데 이 하천들은 최고봉인 황금산에서 발원한다. 대부도가 섬의 모양이 낙지 같다하여 낙지섬, 혹은 대나무가 많다 하여 죽호 흑은 모양이 연꽃이 물에 떠있는 것과 같다 하여 연화부수지 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 남양쪽에서 대부도를 바라보면 섬 같지 않고 큰 언덕처럼 보인다고 하여 대부도라고 불렀으며 다음과 같은 전래지명이 있다.